|
[리더피아] Leadership Insight - 지윤정의 감성터치
나의 감성이 타인의 감성을 이끈다
요즘을 4무((四無)시대라고 한다. 무책임, 무목적, 무감동, 무관심 4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은 웬만한 일에는 감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날아가는 새만 보고도 까르륵 까르륵 웃음보를 터뜨렸던 여고생들도 요즘은 심드렁하다. 중학교 1학년인 필자의 딸도 웬만한 개그엔 눈도 깜짝 안 한다. 필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할 정도로 웃고 있는데 “엄마, 저런 얘기 처음 들어? 비슷한 얘기 많아”하며 채널을 돌린다. 강의를 가서 성인 학습자를 만나도 웬만한 내용에는 솔깃하지 않는다. 인터넷, 케이블 TV, 책 등 범람하는 정보들로 예전 우리 때보다 아는 게 참 많다.
이런 모습이 부럽기도 하지만 온전한 몰입과 감동이 없어서 안타깝기도 하다. 감성이 메마르다 보니 감동이 없는 것이다. 물론 임신한 임산부처럼 너무 기분이 이랬다저랬다 팔랑거려도 안되겠지만 심장에 굳은 살이 딱딱하게 박혀 손톱깎이로도 떼낼 수 없을 만큼 굳어진 가슴도 재앙이다. 감성이란 자신과 상대의 기분을 알아채고 우뇌를 작동시켜 상황을 상상하는 감정이입 능력이다. 롤러 메이어는 성숙한 어른은 감정의 폭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고 섬세한데 반해 보통사람은 기상나팔처럼 단순하다고 했다. 나는 와인도 그 맛이 그 맛인 것 같은데 소믈리에는 레그 향 여운까지 입체적으로 맛을 음미한다. 우리는 맛만 단순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분도 나팔처럼 단순하게 한두 가지로 뻔하다. “기분 나빠, 기분 좋아, 열 받아, 그냥 그래.” 이외에 딱히 떠오르는 표현이 없다. 물론 이것이 표현의 한계라면 괜찮은데 혹시 느낌 자체의 한계는 아닌지 의심해보자.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나와 타인의 감정을 잘 인식한다. 감정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 원인을 헤아려 추스를 줄 안다. 다양한 맛을 채 느끼기도 전에 얼른 목구멍으로 넘겨버리는 것처럼 그 동안은 감정도 꿀꺽 먹어버리는 게 프로다운 모습으로 평가됐다. 감정은 나타내지 않는 게 점잖은 것이라고 인식됐고, 감정의 변화를 억누르는 것이 절제력이라고 인정받았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성이라는 울타리를 치고 감정적 유대관계 없이 메마른 가면놀이를 하게 만들었다.
머리만 쓰지 말고 마음을 쓰자 하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감성이 대세다. 이제 ‘이성’만으로는 변별력이 없다. ‘이성’은 하이테크놀러지 시대에 모두가 상향 평준화됐다. 이성만으로 경쟁력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가격, 품질, 유통, 판촉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 고객을 지켜내지 못한다. 급여, 사무실 위치, 인센티브, 복리후생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 직원을 지켜내지 못한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내야 하고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감성이 경쟁력이다. 머리만 쓰지 말고 마음을 써야 한다.
디자이너 김영세씨는 “가슴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감탄시키지만,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감동시킨다. 냉철한 리얼리티도 중요하지만 촉촉한 윤활유와 같은 감성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삶은 팍팍하게 말라버린다. 물론 감성도 잘 활용해야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열을 수 있다. 성격도 수준에 따라 ‘성품’이 되기도 하만 ‘성깔’이 되기도 한다. 감정도 그렇다. 감정이 잘 사용되면 ‘감성적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라고 말하지만 감정이 잘못 사용되면 ‘예민하다, 신경질적이다’라고 표현된다.
진정한 감성능력은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감정의 주인이 돼 내 감정을 조절하고 좋은 감정을 선택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화가 난 걸 들켜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화났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사람 말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감정을 누르고 감정을 없애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준비 없이 큰 일을 맞은 삼형제의 반응은 달랐다. 첫째 형은 장례식을 치르고 조문객을 맞고 장지를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둘째 아들은 외향적인 성격이라 조문객과 대성통곡을 하며 몇 날 밤을 울었다. 막내 아들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식음을 전폐하고 다락방에 틀어박혀 슬퍼했다. 이 삼형제 중 누가 6개월 후에도 슬픔의 후유증을 앓고 있을까? 맏아들이다. 맏아들은 슬플 겨를이 없었다. 맏아들은 장남의 책임감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접어둔 채 터진 일들을 수습했다. 6개월 후에 맏아들은 새록새록 피어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잠 못 드는 밤을 지샌다.
이처럼 사람의 감정은 억누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지로 감춰도 안되고 상대에게 그대로 되돌려줘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회피하면서 다른 즐거움을 찾아서도 안 되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엉뚱한 것에 쏟아내서도 안 된다.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맞이해줘야 한다. 가만히 나의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고 그 원인을 찾아 스스로를 애도해야 한다.
프로이드는 마음에 병이 걸리면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스스로의 감성을 잘 추슬러야 타인에게 감성을 발휘할 수 있다. 아내와 싸워서 화가 난 아침, 실적이 안 좋아서 열불이 난 월말, 그것을 감추거나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 리더는 썩 감성적이지는 않다. 화가 난 것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추스르며 직원들에게 건설적인 기분으로 고백하는 것, 직원들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유쾌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리는 것, 그래서 서로 감정적 유대와 공감을 나누며 더 바람직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 그런 리더가 감성적인 리더다.
기능보다 감성 중심의 시대 이제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들자. 이제 몸과 머리만 사지 말고 마음을 사자. 가슴을 흔들려면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해야 한다. 소통이란 본래 ‘관계를 가지다’ ‘공통분모를 가지다’라는 뜻이다. 즉 소통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분석하는 것 이전에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만드는 일이 먼저다. 필자도 기업체 강의를 나가면 학습자들이 최첨단 지식을 알릴 때는 ‘네이버에 뒤져보면 있겠지’ 하며 심드렁하다가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학습자 개인의 관심사와 연결시켜 말하면 솔깃해한다. 딱딱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으로 진정한 소통을 하고 싶다면 생각의 지붕을 헐고 따뜻한 유대감으로 구들장을 지피자. 내가 먼저 손을 펴야 상대와 악수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먼저 부드럽게 감성을 열어야 상대의 감성도 깨울 수 있다.
이제 상대의 마음과 느낌을 헤아리고 오감을 자극하는 섬세함을 발휘해보자. 이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인 오감뿐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인 육감까지 헤아려보자.
글 윌토피아 지윤정 대표이사
|